강화의 역사
작성일  2007-04-06 조회수  6332
강화의 역사에 대해 쓴 글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각각의 번호는 강화의 역사를 정리한 별개의 글들입니다. 일부 자료는 출처가 확실하지 않아 기입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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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는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이는 강화도에서 발견되는 많은 구석기 유물과 신석기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곳곳에서 발견되어 상고시대에 인간의 거주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마리산 塹城檀과 단군의 세아들이 쌓은 三郞城의 유적은 상고시대 특히 고조선의 문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강화의 옛이름은 갑곶(甲比古次), 혈구(穴口), 해구(海口), 열구(列口) 등이며 이들 지명은 모두 한강 하구에서 연유하였다.
고구려는 이 곳에 혈구군을 설치했었고 757년에는 신라가 점령하여 해구군이라 개칭하였다.
790년에는 혈구진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여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강화로 개칭하고 현을 두었는데 이때 비로소 江華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몽고의 제 2차 침입 직전인 1232년(고종 19) 고려는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 江都라고 칭하고 몽고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다가 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고려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주조, 팔만대장경의 조판, 상감청자의 제작 등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개경 환도 이후에는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고려 조정과 몽고에 항쟁하다가 진도로 남하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일시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환도하였는데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게 하고, 스스로는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을 열어서 청나라와 강화하였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뒤의 효종)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북벌계획을 추진할 때 그 일환으로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 일은 숙종 때까지 계속된다.
근대에 와서 강화도는 개항을 요구하는 제국주의 열강과의 격전지가 된다. 이는 강화도가 한성으로 통하는 수상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었는데 강화도는 이로 인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가 된다.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서 프랑스 함대가 강화성을 함락하고 약 1개월 동안 머무르다가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에게 대패하자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던 미국함대가 계속 북상하여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육로로 북상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던 어재연 이하 모든 장병은 끝까지 싸우다가 광성보 전투에서 전원이 전사하였다. 1874년에는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 초지진과 포대가 일본 군함의 포격을 받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로써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96년 강화부로 강등되었고, 1906년에 다시 강화군으로 강등되어 오늘에 이른다. 강화도는 지리적 위치로 해서 역사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출처 : http://s.hs.kr/~dnjswnd/visit/강화-연.htm

2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등지에서는 구석기 유물이, 군내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 유물이 채집된 바 있어서 강화도에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점면 부근리와 新三里 등지에 분포해 있는 고인돌,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에 있는 塹城壇, 吉祥面에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게 하였다고 전해지는 三郞城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후에도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정은 몽고의 제 2차 침입 직전(1232년)에 도읍을 이 곳으로 옮겨 江都라 칭하고 몽고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다가 몽고에 항복한 후1270년에 개경으로 還都하였다. 한편 개경환도에 반대하던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키며 고려 조정과 몽고에 항쟁하다가 진도로 남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강화 천도 시기에는 금속활자의 주조, 팔만 대장경의 조판, 상감 청자의 제작 등의 고려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인조는 일시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환도하였다. 이어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또 다시 김상용 등으로 하여금 세자빈,봉림대군,인평대군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게 하고, 강화로 가는 길목이 막힌 자신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였다. 하지만 강화성이 함락되자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을 열어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말았다. 그후, 북벌을 추진하려 하는 효종이 등극하자, 이것의 일환으로 강화도에는 각종 진보 등이 설치되어 외적에 대한 방비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이라는 전혀 새로운 세력은 이러한 강화도의 각종 방위 시설을 무력화 시키고 말았다. 즉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프랑스 함대는 약 1개월 사이에 강화성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가 덕진진과 광성보를 함락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 두 양요를 거친 뒤 조선은 1874년에 강화도 동쪽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였으나, 이듬해에 雲陽號 사건이 일어나 초지진과 그 포대가 일본군의 포격을 받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결국 1876년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는 일본을 비롯한 많은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999년도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추계답사 자료집)

3

강화도는 삼국시대에 백제의 서울인 위례성(한성)의 관문에 자리잡은 요새였고 고구려와 교류를 하거나 바다를 통해 중국 등지의 대외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 기지가 되기도 했다. 한성을 도읍으로 한 백제 전기에는 서해 大島로 알려지기도 했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수군을 거느리고 한강 어귀인 강화 부근에 와서 크게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최대 격전지였던 것으로 알려진 관미성이 한강 유역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고구려는 강화해협을 뚫고 파죽지세로 아리수(우리하, 한강)를 거슬러 백제의 서울인 한성(지금의 강남 지구)을 함락시키고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 이북 58개 성 700촌을 고구려에 내주고 말았다.
그 뒤 5세기 후반 475년에 다시 장수왕이 5만 대군을 몰아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이 죽고 아들 문주왕은 그해 서울을 버리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한강 이남까지도 모두 고구려에 내주었다.
강화도는 이때 고구려에 귀속되었는데 당시 군 이름은 穴口 또는 甲比古次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접 교동도는 고구려의 高木根縣이 되었다. 그 뒤 551년 백제의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553년에는 신라에게 다시 내주고 말았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풍부한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더구나 한강 어귀는 서해를 거쳐 중국과 직접 통교할 수 있는 거점이므로 통일의 결정적인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때 신라의 대외 교통로의 첫번째 문은 강화였을 것이다. 이때는 海口郡 또는 穴口鎭이라 했다.
고려시대에는 강화도에서 우리 민족이 잊지 못할 역사가 전개되었다. 고종 18년(1231) 몽고의 침략을 당했고, 다음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 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로 천도하여 원종 11년(1270)에 개경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39년 동안 몽고군사와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파란만장한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강화를 강도로 불렀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시대 별도인 강도의 왕궁터가 남아 있고 몽고와 항쟁하던 흔적들도 성곽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 무인 정권인 군사적 뒷받침이 되어 몽고와 항쟁해 왔던 삼별초는 원종의 개경 환도가 알려지자 즉시 대항하고 나섰다. 그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곧 진도로 남하하고 말았다.
고려가 몽고와 항쟁하는 와중에서 남긴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면 팔만 대장경의조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당시의 조판을 진행했던 장소와 그 경과를 밝히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그런가 하면 고려 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보물들이 일제시대에 마구 도굴되어 그 폐단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려 청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국보 제133호 靑瓷辰沙蓮花紋瓢注子는 바로 강화도의 최충헌 묘에서 도굴된 것이다. 이 시기에 고려 사람들은 강화 남쪽 마니산 꼭대기에 첨성단을 다시 쌓아 하늘과 단군에게 제사지냈다. 이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국난을 당해 나라를 지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인조 임금은 1627년 금나라 3만 군사의 침입을 받고는 평복 차림으로 강화로 피신하여 100일 동안을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이 바로 丁卯胡亂이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는 인조가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는데, 강화가 청에게 넘어가고 봉림대군과 빈궁 및 여러 대신등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자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강화도는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한 背都가 되어 留守와 經歷을 갖추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효종은 인조 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고 강화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과 같은 방어시설을 새로 쌓거나 고쳤다. 그리고 숙종은 강화도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53개(2개는 얼마뒤에 폐지되었다)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강화도 전지역을 요새화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세력이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먼저 항강 어귀 강화에까지 쳐들어온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마다 강화의 백성들은 외세에 대항하여 번번이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75년 일본 군함이 강화에 침입하여 이른바 운양호사건을 일으켰고, 다음해(1876년)에 강화도 조약이 강요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다. 그로부터 35년 뒤인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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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강화도의 역사는 한반도의 태동과 함께 한다. 단군 이전으로 훨씬 거슬러 올라가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등지에서 채집되곤 한다. 신석기 유물 또한 군내의 여러 곳에서 채집되어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사람이 살았음을 암시한다. 선사시대에 지배층을 형성했던 청동기인들의 고인돌 무덤이 하점면 부근리와 신삼리 등지에 산재된 점이나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塹城壇),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게 하였다고 전하는 길상면의 삼랑성(三郞城)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적인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수백명이 들어야 할 정도의 수십톤에 이르는 거대한 돌들이 어디서 어떻게 옮겨왔는지가 의문일 뿐이다.
<고대시대>
중국으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하고 삼국의 최대 쟁탈지인 한강의 어귀이기도 한 강화도는 선사시대에 이어 삼국시대에도 끊임없이 주목받아 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으로 해전과 육전의 요충지였고, 고구려는 일찍이 이곳에 '혈구군'을 설치하였다. 중국과 해상.육상 통로가 없었던 신라 역시 자주 이곳을 넘봤다. 삼국이 통일되면서 757년에 통일신라가 강화를 점령하면서 '해구군'이라 개칭하였고 790년에 다시 '혈구진'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였다.
<고려시대의 강화도>
강화는 940년에 현으로 승격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야 강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는 고려역사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1231년 몽고의 대대적인 침입을 피해 고종과 최씨정권은 개경에서 가까운 섬 강화로 천도(1232)하여 끈질긴 저항으로 39년간의 장기전을 치르게 된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前삼국간의 지역 갈등과 민족 갈등이 있었으나 강화천도 이후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단일민족으로의 민족주체성이 확립하게 되었다. 당시의 고려 궁터가 강화읍 관청리에 남아 있다.
<몽고의 침략과 강화천도 1232>
고려는 1170년 정중부로 대표되는 무신의 반란으로 100여년간 무신 정권이 지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씨가문의 4대에 걸친 60여년의 집권기는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고 반면에 사회적으로 몽고의 침입에 시달리는 시기이기도 한다. 초기의 무신정권의 혼란은 최충헌의 등장에서 최우로 이어지는 독재체제속에서 점차 안정되어 간다. 그러나 최우의 집권 10년만에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고 대제국 몽고의 무리한 요구에 최우는 1232년 강화로 천도하고 몽고와의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대륙민족인 몽고는 해상전에 약해 강화도가 섬이라는 이유로 접근하지 못하고 대신에 전국으로 흩어져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때 소실된 것이 초조 대장경이나 황룡사9층목탑 등이 있다. 천도 이후 강도(江都)라 불리던 강화에서의 고려 조정은 전란에 휩싸여 고통을 받고 있는 민심의 수습과 통일, 전쟁의 승리를 불력에 호소하기 위하여 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8만 1,137매의 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이는 시련 속에 제작된 문화재이니 만큼 고려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몽고는 항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무리한 요구를 동반한 화친을 간간이 요구하였고 최씨가문은 몽고의 철수만을 요구하였다. 40여년간 계속된 몽고와의 항전은 강토가 피폐되고 백성도 지쳐 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달리 생각되었던 한민족으로서 민족 주체성이 완성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화의 천도 역사는 최씨정권의 몰락으로 1270년에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 고려 조정은 다시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막을 내린다.
<삼별초의 난 1270>
삼별초는 최씨의 사병부대적인 성격이었으나 장기적인 몽고와의 항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면서 삼별초는 몽고와의 강화에 반대하고 강화도에서 몽고와 고려조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려조정의 탄압에 의해 삼별초는 1천여 척의 배에 각종 재물과 함께 고려에 남아 있던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고 진도로 남하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삼별초의 난은 강화도,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서 배중손이 전사한 가운데에서도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다 4년만에 진압되었다.
<조선시대의 강화도>
강화도의 역사적 기능이 더해짐에 따라 고려 우왕때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 조선시대에도 계속적인 승격이 이루어지고 부윤등이 파견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잡힌 것을 생각하여 북벌 계획의 일환으로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효종의 사업은 숙종 때까지 계속되어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 등이 축조.설치되어 이중 삼중의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탄탄한 군사적 위치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의 잦은 외세의 침입에도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에 파괴된 성곽중에서 현재 복원되었거나 상태가 양호한 전적지는 스물 여덟 곳이다.
<병자호란 1636>
광해군의 부윤파견이후 인조는 1626년 강화를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그 이듬해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여 당시의 후금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에는 강화가 완전 함락되고 마는 치욕스런 사태에 이르른다. 정묘호란을 피해 강화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보낸 인조는 이곳에 행궁을 짓게 했다. 대륙민족으로 해상전에 약한 청국의 또다른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피신처를 마련해 두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인조14년 12월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다. 인조는 우선 강화유수 장신에게 강화를 튼튼히 지키라고 명하고, 정묘호란 때 유도대장이었던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봉림대군등과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로 피신케 했다. 그러나 막상 한성을 빠져나가려던 인조는 남대문앞에서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함께 일단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나 전세는 불리하였다. 계획상 다음날 새벽 강화로 떠나려 하였으나 밤새내린 눈으로 길이 막히고 말았다. 청나라장수 용골대는 정묘호란때 인조가 강화도를 피신한 것을 상기하며 강화를 점령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청군은 청군을 얕본 조선군의 허름한 방어를 틈타 뗏목으로 물길을 건너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를 함락시켰다. 강화가 함락되자 김상용은 분신하고 군.민 할것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청군의 침략 한달여 만인 1637년 1월 30일 조선은 남한산성마저 함락되어 가장 치욕적인 역사인 삼전도의 굴욕을 하게 되었다.
<근대의 강화도>
근대에 들어서도 프랑스의 병인양요(1866), 미국의 신미양요(1871), 일본의 운요호사건(1875) 등 제국주의자들이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호시탐탐 넘보는 게 강화도였다. 고려나 조선의 강화천도에 따른 귀족적 문화재가 산재된 강화도의 일대의 고분들은 파헤쳐 고려청자를 비롯해 최상급인 부장품들을 도굴하거나 민가를 약탈하고 외규장각에 소장된 귀중한 도서들을 빼내갔다. 프랑스박물관에 소장된 규장각 도서들이나 직지심경 등은 이때 약탈해 간 것이다. 그들이 빼내 간도서와 문화재는 현재 우리 나라에는 없는 희귀한 것들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감히 헤아릴 방도가 없다.
<병인양요1866>
조선 후기 서양 선교사에 의해 전래된 천주교는 조상의 제사 거부로 인하여 전통적인 유교와 마찰을 빚게 되었고 중국의 천주교 탄압에 이어 조선에서도 1866년 정월에 이른바 병인박해라 불리는 대대적인 사옥이 전개되어 프랑스신부 9명과 천주교신자 8천명을 처형하게 되었다. 피신한 프랑스신부의 연락으로 로즈(Roze)제독은 같은해 9월에 전함 7척과 2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 갑곶진에 닻을 내리며 선교사 처벌책임자처단, 배상금지급, 통상조약체결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강경책을 수립하였고 장기전에 돌입하기 위하여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함락하고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겨울을 준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0월 3일 정탐에 나선 프랑스군에게 양헌수(梁憲洙)가 지휘하는 조선 의용군 부대가 매복해 있던 전등사 입구에서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정족산성 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스군은 갑곶진으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전부다 폐허가 되어 있었고 행궁과 외규장각에서 서책 340여종과 은괴 19상자등을 약탈해 갔으며 운반하지 못한 남은 서책등과 외규장각을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미양요1871>
일찍이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 이양선의 통상 요구가 꾸준히 전개되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병인양요 이후 고조된 위정척사 운동으로 일체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무시한 채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문화재 도굴과 약탈을 일삼았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식량을 대주며 조용히 돌아갈 것을 설득하였으나 만행이 계속되자 평양 관민이 합세하여 대동강에서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고 미국 선원을 살해하였다. 이에 미국은 그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사건의 진상 확인, 관련자 처벌, 배상금을 요구하는 한편 극동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 해협을 정찰했다. 1871년 4월에 미국은 로저스(Rodgers)제독을 파견하여 5척의 군함과 1,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던 중 광성보(廣城堡). 덕진진(德津鎭)등에서 포격을 받아 인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다시 북상하여 초지진(草芝鎭). 덕진진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 이후 강화된 국방력과 병사들의 분전으로 어재연(魚在淵)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가 광성보와 갑곶 등지에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광성보전투에서 미군 뿐만 아니라 어재연 장군과 조선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게 되었고 강화는 또 한차례의 전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운요호사건>
신미양요 이후 강화도 동쪽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여 외침에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운요호 사건으로 초지진과 포대가 일본군함의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1875년에 일본군이 '마실물을 요구한다'는 핑계로 강화도에 운요호를 대고 개방을 요구하며 살인.방화.약탈을 일삼기에 조선군이 이를 저지한다는 이유로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했다. 1876년 2월 26일 8척의 일본군함의 무력시위속에서 강화진무영병사를 훈련시키던 연무당에서 조선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조약은 조일수호조규. 강화조약. 병자수호조약이라는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주로 강화도조약이란 명칭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조약의 내용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여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부산등 세항구를 개항하게 하였으며 과거 미국이나 영국이 자신의 나라에 그랬던 것처럼 치외법권, 해안측량권등을 요구하여 조선의 주권에 침해하였다. 강화도조약은 아시아의 식민지화를 겨냥하여 대만에 이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의도에서 체결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자력에 의한 개방은 좌절되었다.
<결론>
강화도는 한마디로 말해 반만년 한반도의 역사의 시작이며 또한 걸쭉한 사건들에 언제나 휩싸인 고통의 땅이다. 강화도는 한강.예성강.임진강등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개경이나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과정으로 강화도에서 접전을 벌였고 고려 시대에는 동.서양에 할것없이 전란의 공포에 휩싸이게 한 몽고족을 피해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던 곳으로 38년간 고려의 수도로써 기능을 하였고 이러한 역사적 가치는 현재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궁터가 작게나마 전한다. 또한 조선 시대의 강화도야말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약탈당하고 불태워지고 하던 역사를 가졌다. 고려 몽고족에 이어 조선 시대에는 여진족(만주족)에 의한 병자호란을 시작으로 하여 프랑스인에 의한 병인양요, 미국인에 의한 신미양요 등이 있으며 최종적으로 일본의 배 운요호에 의하여 강화는 굴복하고 만 것이다. 강화는 전시대에 걸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마디로 피에 물든 한국사의 축소판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난 속에서도 일궈지고 지켜진 문화-특히 팔만대장경, 상감청자등-는 저항속에서 일구고 승화시킨 것이어서 귀하고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조선시대의 외규장각에 비치된 중요한 서적들이 이민족에 의해 약탈당하거나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삼국 시대의 혈구라는 이름에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처음 강화라 칭해진이후 고려 충렬왕 때 인주(현재 인천)에 병합되었다가 우왕3년(1377)에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1973년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된 이후 하나의 군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나 바로 3년전인 1995년 1월 강화는 다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어 고려 충렬왕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강화는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으로 시작하여 단군의 유적으로 전해진 삼랑성과 참성단등을 거쳐 고려 시대의 궁터, 조선 후기에 프랑스군인에 의해 전부 불에 탔으나 간신히 남아 증축한 용흥궁(철종의 집)이나 아니면 이민족의 침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초지진이나 광성보등을 살펴볼 수가 있다. 강화는 아픈 역사의 흔적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관광지가 되었지만, 강화는 여전히 강화이고 강인한 땅이다. 그것이 해쳐서는 안 될 강화의 정서이다. (원광대학교 사학과 98 추계 답사자료집. 방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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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사회
하점면 장정리, 하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었고, 군재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 유물이 채집된 바 있어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점면 부근리와 신삼리 등지에 분포해 있는 고인돌,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塹城壇), 길상면에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게 하였다고 전하는 삼랑성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후에도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이곳에 혈구군을 설치하였으나 757년(경덕왕 16)에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여 해구군이라 개칭하였고, 790년(원성왕 6)에는 혈구진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였다.
(2) 중세사회 - 고려
940년(태조 23)에 강화로 개칭하고 현을 두었는데, 이때 비로소 강화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몽고의 제2차 침입 직전인 1232년(고종 19) 고려는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 강도(江都)라고 칭하고 몽고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다가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고려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주조, 팔만대장경의 조판, 상감청자의 제작 등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시기이다. 개경환도가 이루어지자 이에 반대하던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고려조정과 몽고에 항쟁하다가 진도로 남하하였다. 이재 삼별초는 1천 여척의 배에 각종 재물과 함께 인질로 삼은 과관의 가족들을 싣고 진도로 남하하여 항쟁을 계속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피해가 컸으며, 충렬왕 때에는 잠시 인주(仁州:현재의 인천)에 병합되었다가 1377년(우왕 3)에는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3) 근세사회 - 조선전기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18년(광해군 10)에 부윤을 두었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일시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환도하였는데, 이때 부윤을 다시 유수로 승격시켰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김상용 등으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봉림대군·안평대군 등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게 하고, 스스로는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을 열어서 청나라와 강화하였다. 병자호란 후에 봉림대군(뒤의 효종)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북벌계획을 추진할 때 그 일환으로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일이 숙종 때까지 계속되어 강화도에는 내성·외성·12진보·53돈대 등이 축조, 설치되어 이중 삼중의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또 1678년(숙종 4)에는 강화부윤이 진무사를 겸직하도록 하고 강화만 일대를 방어하는 오영(五營)을 통솔하게 하였다.
(4) 근대사회 - 조선후기
1886년(고종 3)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 강화성을 함락하고 약 1개월 동안 머무르다가 정속산성 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에게 패퇴하자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성이 함락될 때가 전 병조판서 이시원(李是遠) 형제가 독약을 마시고 순절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던 미국함대가 광성보·덕진진과 대안인 통진·덕포진 등의 포격을 받고 인천방변으로 퇴각하였다가 다시 북상하여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초지진(草芝鎭)을 점령한 미국 해병대는 육로로 북상하여 덕진진과 광성보를 함락시켰다. 광성보 전투에서는 어재연 이하 모든 장병이 끝까지 싸우다가 중상자를 제외한 저누언이 전사하였다. 이 두 양요를 거친 두 1874년에 강화도 동족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여 외침에 대비하였으나, 이듬해에 운요호사건이 일어나 초지진과 포대가 포격을 받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1876년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는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게 외었다. 1896년(건양 1)에는 강화부로 강등되었고, 1906년(광무 10)에 다시 강화군을로 강등되었으며, 1914년에는 교동군이 편입되었다.
(5) 현대사회
1950년에 6·25동란으로 북괴군이 침입하자 군민들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들을 격퇴시켰는데, 강화읍 입구에는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전사한 19인의 영령을 추모하는 '강화특공대의적비'가 세워져 있다. 1973년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83년에는 하점면 양오리가 송해면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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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경기도 북서부의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하는 하구에 위치하며, 옛 이름은 갑곶(甲比古次), 穴口, 海口, 列口 등이다. 이들 지명은 모두 한강 또는 하구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江華로 개칭하고 현을 두면서, 비로소 강화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중부를 흐르는 한강의 관문으로, 강화도를 중심으로 교동도, 석모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비록 제주도와 거제도보다 작지만 도내의 여러 곳에서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채집된 바 있어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약 2만년 전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비롯하여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쌓았다는 摩尼山의 塹城壇(사적 제136호), 길상면에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하여 쌓게 하였다고 전하는 三郞城(사적 제130호) 등이 있는 것을 보아, 청동기시대 이후에도 인간의 거주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본 글에서는 강화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개괄하고 이에 따른 강화도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1) 三國時代
중국으로 통하는 관문이기도 하고 삼국의 최대 쟁탈지인 한강의 어귀이기도 한 강화도는 삼국시대에도 끊임없이 주목받아 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으로 海戰과 陸戰의 요충지였으며, 고구려는 일찍이 이곳에 '穴口郡'을 설치하였다. 중국과 해상, 육상 통로가 없었던 신라 역시 자주 이곳을 넘봤다. 삼국이 통일되면서 757년에 통일신라가 강화를 점령하면서 '海口郡'이라 개칭하였고 790년에 다시 '穴口鎭'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였다.
2) 高麗時代
강화는 940년에 현으로 승격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야 강화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231년 몽고의 대대적인 침입을 피해 고종과 최씨정권은 개경에서 가까운 섬 강화로 천도(1232)하여 끈질긴 저항으로 39년간의 장기전을 치르게 된다. 대륙민족인 몽고는 해전에 약해 강화도가 섬이라는 이유로 접근하지 못하고 대신에 전국으로 흩어져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지역 갈등이 있었으나 강화 천도 이후 팔만대장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단일민족으로의 민족주체성이 확립하게 되었다. 당시의 고려 궁터는 강화읍 관청리에 남아 있다. 강화의 천도 역사는 최씨정권의 몰락으로 1270년에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 고려 조정은 다시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막을 내린다. 후에 몽고와의 강화에 반대한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몽고와 고려 조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강화도,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서 배중손이 전사한 가운데에서도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다 4년만에 진압되었다.
3) 朝鮮時代
강화도의 역사적 기능이 더해짐에 따라 고려 우왕 때 江華府로 승격된 이후 조선시대에도 계속적인 승격이 이루어지고 광해군 때에 부윤이 파견되었다. 이후 인조는 1626년 강화를 留守府 (주1)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그 이듬해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여 당시의 후금과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에는 강화가 완전 함락되고 마는 치욕스런 사태에 이른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북벌 계획의 일환으로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효종의 사업은 숙종 때까지 계속되어 內城, 外城, 12鎭堡, 53墩臺 등이 축조, 설치되어 이중삼중의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탄탄한 군사적 위치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의 잦은 외세의 침입에도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에 파괴된 성곽 중에서 현재 복원되었거나 상태가 양호한 전적지는 스물 여덟 곳이다.
근대에 들어서도 프랑스의 병인양요(1866), 미국의 辛未洋擾(1871), 일본의 운요호 사건(1874)등 제국주의자들이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호시탐탐 넘보는 게 강화도였다. 그들은 고려나 조선의 강화 천도로 귀족적 문화재가 산재한 강화도 일대의 고분들을 파헤쳐 고려청자를 비롯해 최상급 부장품들을 도굴하거나 민가를 약탈하고 외규장각 (주2) 에 소장된 귀중한 도서들을 빼내갔다. (주3)
강화도는 반만년 한반도의 역사의 시작이며 또한 굵직한 사건들에 언제나 휩싸인 고통의 땅이다. 강화도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 등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개경이나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과정으로 강화도에서 접전을 벌였고, 고려시대에는 몽고족을 피해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던 곳으로 38년간 고려의 수도로써 기능을 하였으며, 또한 조선시대의 강화도야말로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약탈당하고 불태워지던 역사를 가졌다. 고려 몽고족에 이어 조선시대에는 여진족에 의한 병자호란을 시작으로 하여 프랑스에 의한 병인양요, 미국에 의한 신미양요 등이 있으며 최종적으로 일본의 운요호에 의하여 강화는 굴복하고 만 것이다.
4) 결언
강화는 전시대에 걸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마디로 피에 물든 한국사의 축소판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난 속에서도 일궈지고 지켜진 문화, 특히 팔만대장경, 상감청자 등은 저항 속에서 일구고 승화시킨 것이어서 귀하고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조선시대의 외규장각에 비치된 중요한 서적들이 이민족에 의해 약탈당하거나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주1) 留守府인 江華府에는 품관, 곧 정규 관원만 해도 종2품의 留守가 둘(한 자리는 경기관찰사가 겸임), 그 밑에 종4품의 經歷이 하나, 종9품의 分敎官과 檢律이 각각 하나씩 모두 다섯 자리가 있었다. 그밖에 裨將이 10, 月令 1, 鄕所 2, 그리고 吏隸가 書吏 40, 廳直 55, 隸 25, 奴 33, 婢 55 등이 있어 실무 행정을 담당하였다. 또 各里에는 風憲, 約正, 勸農官, 書員, 討捕將 등이 있어 일선 행정을 도왔다. 이는 일반 행정 계통만을 든 것이고, 長寧殿, 萬寧殿, 史閣 등 왕실 관련 기관과 鎭撫營을 비롯한 군사기관에는 또 그에 걸맞는 많은 관리자와 군관, 군졸들이 있었다.
(주2) 1782년(정조 6) 정조는 창덕궁에 설치되어 있던 奎章閣의 분관(外奎章閣)을 강화에 설치하였다. 규장각을 비롯해 몇 곳에 흩어져 있던 왕실의 중요 문서들을 모아 보관할 목적이었다. 그러고서는 그 첫 사업으로서 자신의 할머니인 당시 왕대비(영조의 繼妃인 貞純王后 金氏와 어머니 惠敬宮 洪氏, 그리고 정조 자신의 冊寶(王妃나 王世子, 王世子嬪으로 책봉될 때 그 경위를 옥이나 대나무 등에 적은 玉冊, 竹冊 등과 그때 받은 칭호를 새긴 커다란 도장 金寶와 선원보략(왕실의 족보), 列聖誌狀(역대 왕들의 행적을 적은 글), 御製(왕들이 지은 글) 등을 奉安하였다. (홍순민, 「강화가는 길」,『황해문화』11, 1996, 새얼문화재단)
(주3) 1813년(순조 13) 이후 『外奎章閣圖書曝 形止案』에 의하면 당시 이곳에는 1,042종 6,130책이 보관중이었다고 한다. 그중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것은 200종 340책으로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 參考文獻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1996
강화사편찬위원회 편, 『江華史』, 江華文化院, 1988.
이형구, 『강화도』, 대원사, 1994
홍순민, 「강화가는 길」,「江都의 宮」,「강화 한 바퀴」,『황해문화』11∼13,새얼문화재단, 1996
정신문화연구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웅진출판사, 1991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1999년 추계 답사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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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a99 음.. 알아보기가 쉽군요..  (2008-05-14 오후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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