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곡 정제두의 종법 시행과 예론
작성일  2009-12-13 조회수  4343
霞谷 鄭齊斗는 陽明學이 이단시되던 시대상황에도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지키며 양명학 사상체계를 확립한 인물이었다. 그는 예학의 시대를 살았던 만큼, 그의 예론은 양명학자 정제두의 현실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정제두는 먼저 자신 집안의 상제례를 정비하고 宗法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壬戌遺敎」에서 그는 간략함을 따르는 실용적인 禮를 강조하였다. 특히 󰡔주자가례󰡕의 실용성에 주목하여 古禮를 보태는 󰡔상례비요󰡕를 비판하였다. 또한 少論系 학통에 의거해 牛溪 成渾의 예설을 존중하는 한편, 잘못된 時俗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宗子 중심의 종법 확립과 종중질서 마련에 적극적이었다. 잘못된 攝主 관행으로 다른 친족이 宗子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종자의 절대권을 주장하였다. 또한 종인들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종중 질서 확립에 앞장서고 있었다.


정제두는 山林이자 원로대신으로서 왕실의 典禮問題에 참여하였다. 그는 숙종 44년 端懿嬪 복제논의에서 報服의 관점에 합당한 國制를 채용하였고, 이를 통해 예송의 소지를 없애는 실용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영조대 景宗과 孝章世子의 복제논의에서는 王禮의 특수성을 통해 군주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는 왕실 복제에서 宗統을 잇는 繼體를 倫序보다 우선시하였다. 이에 경종과 영조를 부자관계로 상정하고 이를 전제로 효장세자에 대한 왕대비와 대왕대비의 상복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왕실과 사대부를 막론하고 윤서와 천륜에 의해 상복을 결정하는 老論의 예론과는 분명한 차이를 갖는 것이었다. 또한 정제두는 󰡔五禮儀󰡕를 근본에 두고 노론에 의해 주도된 숙종복제를 비판하였다. 그는 왕실의 복제는 고례와 󰡔오례의󰡕를 근거로 하고 士庶人이 함부로 왕실의 전례를 고치는 것을 경계하였다. 정제두의 王室服制論은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는 臣權을 王權에 종속시키는 皇極蕩平論을 주장하였다. 황극탕평론은 양명학의 일원적 사상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군주 중심의 일원적 정치운용체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왕권 중심의 탕평책을 통해 당쟁의 폐해를 씻고 실리적인 정책을 펴고자 했던 그의 경세사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김윤정) 인천학연구 9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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