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이 해방 전후 '투쟁'하지 않은 이유
작성일  2010-01-17 조회수  4895
[서평]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죽산 조봉암 평전>  - 구영식
 
1932년 9월 28일. 죽산 조봉암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 공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프랑스 경찰에 검거됐다. 이후 12일 만에 일본 경찰에 넘겨졌고, 같은 해 12월 3일 인천항을 통해 국내로 압송됐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압송된 조봉암은 신의주 검사국으로 옮겨졌고, 신의주 지방법원은 1933년 12월 27일 그에게 7년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1939년 7월 형기를 1년 남겨놓고 풀려났다.
신의주 감옥에서 보낸 6년은 조봉암에게 혹독한 기간이었다. 고문으로 상한 손가락 7개가 동상으로 잘려나가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6년의 감옥살이는 그에게 육체적 고통만 안겨준 것은 아니다. 노선전환의 계기가 만들어진 기간이기도 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이 1939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후부터 1945년 1월 예비검속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게다가 그는 해방 직후에도 한동안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 
 
"죽산의 독립운동 휴지기 연구가 더 필요하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최근 펴낸 <죽산 조봉암 평전>(시대의 창)에서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이 출감 뒤에 생업에만 충실하면서 소시민적 생활인이 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라며 "독립운동 휴지기 5년여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자의 지적처럼 1939년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5년간 조봉암의 행적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인천에 자리를 잡은 조봉암은 여성 공산주의자였던 김조이를 다시 만나 가정을 꾸렸고, 정미소에서 나온 왕겨를 수집해서 연료로 공급하는 인천의 비강조합 조합장을 맡았다. 국내외에서 창씨개명 실시, 하와이 진주만 기습, 조선어학회사건 등이 일어났지만 조봉암은 "소시민적 생활인"으로 살아갔던 셈이다.
출옥 이후 5년간의 '독립운동 휴지기'는 해방 직후 조봉암의 활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동지'였던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재건작업에 나서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물론 조봉암이 해방 직후 어떤 활동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인천치안유지대와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인천지부 의장에도 선임됐다. 또 협동조합 인천지부 결성에 열정을 보이면서 인천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철저히 '인천'이라는 지역에 한정돼 있었다. 해방공간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
김삼웅 전 관장은 "조봉암은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공산주의 이념과 그 주의자들의 행태에 상당한 회의를 가져던 것 같다"며 "그래서 누구 못지않은 반일‧반제투쟁을 하고 그 대가로 심한 옥고를 치르고도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 활동 무대에 적극 나서지 않고 소극성을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진보당 강령을 기초했던 이동화 전 민주사회주의연구소 의장은 <현대공론> 1989년 6월호에 기고한 '죽산 조봉암-사형집행, 그 후 30년'이란 글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해방 후 죽산은 공산주의와는 담을 쌓았다. 인천에 눌러앉아 민전의 인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과거 조선공산당의 거물이었던 죽산을 아는 사람들은 의아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죽산은 끝내 공산당과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중략)  
여기서 왜 죽산이 공산주의와 손을 끊었는가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죽산은 해방 이후 과거 그가 몸담았던 공산주의, 즉 폭력혁명을 제창하는 볼셰비즘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인정하고 점진적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해 나가려는 민주사회주의로 돌아온 것이다."
 
미군정 정보보고서도 "죽산 조봉암은 건준‧민전‧노동조합운동 등에는 제법 정력을 기울이지만 공산당운동 자체에는 소극성을 보인다"며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이는 해방 전 약 3년 동안 일본 관헌의 냉혹한 감시 때문에 사실상 이렇다 할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낙오자가 된 때문이기도 했지만 과격한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만은 회의적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해는 죽산 조봉암이 서거한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5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조봉암의 유족들.

편협한 이념구도, 조봉암을 사법살인에 이르게 하다 
 
조봉암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해방 이후 처음 맞이한 3‧1절 행사(1946년, 27주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서울에서는 우익 진영과 좌익 진영이 서울운동장과 남산공원에서 따로 행사를 치른 반면, 인천에서는 그의 사회로 좌‧우익 정치세력과 사회‧종교단체들이 함께 행사를 치른 것.
김 전 관장은 "조봉암은 국가의 운명을 가름하는, 남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미‧소 대표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회담을 하는 시기에, 우익은 우익대로 좌익은 좌익대로 각기 주도권 싸움에 매몰되어 있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큰 결단을 하기에 이른다"며 "전향한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이 되면서 좌익전선에서도 혁명노선과 함께 비혁명적 노선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조봉암은 박헌영 중심세력과 결별해 비혁명적 노선, 즉 민주사회주의 노선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한다"는 분석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조봉암은 1946년 3월께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공산당과 결별을 예고했다. 이어 같은 해 6월 22일 인천 도림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미‧소공위촉진시민대회'에서 '비공산정부를 세우자'는 성명서를 배포함으로써 사실상 '전향'을 선언했다.
<조봉암과 진보당>을 펴낸 정태영씨는 6년간의 감옥살이에서 노선전향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민족운동과 코민테른 노선의 갈등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되고, 레닌시대의 동지인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부하린, 카메네프 등을 스탈린이 무자비하게 숙청한 사건 등도 죽산에게는 충격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옥중에 있던 1930년(대) 무렵에 죽산은 민족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고 봐야 돼요. 이미 그때 코민테른 노선, 볼셰비키 노선과는 선을 그었다고 봐야겠지요. 그것이 입증되는 것이 해방되고 난 후 그의 행적입니다. 이 정도의 이론적 지도자였고 조직 지도자였던 사람이 왜 해방되자마자 중앙무대에 나와서 뛰지 않았겠어요? 공산당 재건에 맨 앞장을 서야 할 사람이 왜 안 그랬겠어요?" (<역사비평>, 1990년 겨울호)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조봉암이 특정 계급의 정당이 아닌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는 '합법적 대중정당'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낸 뒤 한국적 진보정당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진보당'을 창당한 것도 그러한 노선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50여 년 전 내놓은 '평화통일론'과 '고루 잘 사는 사회'는 현 진보정당들의 노선과도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외쳤던 조봉암은 1959년 7월 자신을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한 이승만 세력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했다. 그조차 수용할 수 없을 만큼 해방 이후 한국사회는 편협한 이념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동화 전 민주사회주의연구소 의장은 "죽산의 판단이 탁월했던 것은 전후 유럽세계의 발전 과정이 입증해주고 있다"며 "그러나 6·25 이후 분단 고착화에 따른 극우세력의 대두, 즉 이승만 일당과 한민당까지 포함한 반동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던 시대가 그를 불행으로 몰고 갔다"고 평가했다.  
<죽산 조봉암 평전>의 저자인 김삼웅 전 관장은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죽산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그의 시련에 찬 항일운동을 평가해야 한다"며 "사법부는 부끄러운 선배들의 죄상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재심 청구를 통해 '사법살인'의 올가미를 벗겨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전글 하곡 정제두의 종법 시행과 예론
[목록보기] 
COMMENT